나도 그게 내가 될 줄 몰랐지.
남자친구 사겼는데 부모가 “그 남자 만나지말거라” 하는 그런 장면들이 내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난 로미오줄리엣 따위를 꿈 꾼 적 없고 나름 장녀로 지고지순하게 탈선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딱 하나, 내 연애가 전혀 내 맘같지 않다.
말했지만, 내가 만나는 남자를 엄마 아빠가 탐탁치 않아하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나도 딱히 예상하면서 살진 않았어서 매일이 당황스럽고 상처받고 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 기분은 아무리 겪어도 도대체 익숙해지질 않고 마음에 매일같이 다른 종류의 생채기를 낸다.
게다가 바로 전 남자친구를 부모님이 아주 좋아했던 것이 우리 발목을 잡은 것 같다. 전남자친구와 우리 가족은 몇 차례 어울렸고 지금의 나는 그걸 통곡할만큼 후회하고 있다. 아주 지저분한 이별을 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나의 개차반같은 성격 때문에 그 착한 눈망울을 한 건실한 총각을 들들 볶아 미쳐버리게 만들어서 헤어진 줄로만 아시지. 난 굳이 헤어진 인연에 대해서 어~ 알고보니 개쓰레기였더라고~^^ 라고 하고 다닐 필요를 못 느낀데다가 그런 사람 만나며 보낸 세월이 자존심 상해서 그냥 대충 어 그냥 자주 싸워서 헤어짐. 으로 일관했었지만 내 부모님 앞에서 아주 퍼펙트한 모습만 보여준 자칭 일등 신랑감 구남친의 모습 때문에 내 현남친의 퍼포먼스는 비교적 너무 구려져 버림… 개샛키.. ㅡ 잘 사냐? 난 가끔 네가 떠오를때면 너에게만큼은 세상 모든 성가신 일들이 아주 잦은 빈도로 일어나길 바란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더더욱 이런 순간들이 닥쳐올 때면 서글퍼진다. 그깟 연애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야 하나 싶고. 그냥 헤어질까, 내가 왜 이런 감정적 고통을 감내해야하나 싶다가도 아니,이 남자가 뭘 잘 못했다고 지금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고 내 사랑하는 부모님은 훼방꾼이 되고, 졸지에 나는 머리 굵어졌다고 부모 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철 안 난 딸년이 된 것만 같고. 어깨너머로 얼핏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내 남친은 끊임없이 마음의 내상을 입고 있고. 그야말로 위너라곤 없는 이 상황.
남친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진지하게 만나는 중인걸 부모님이 아신다면 언젠가는 자기를 인정해줄거라고 순진하게 믿고있다.
과연 그럴까, 자네?
코리안의 오만과 편견에 부딪힌 것을 환영해.
오늘도 나는 간헐적으로 베넷부인으로 변하는 엄마와 치열하게 싸웠다. 엄마는 요새 멀쩡한 남의 집 아들래미들을 하나씩 들이밀면서 내 간을 본다. 내가 당연히 시큰둥해도 매일 같이 체크한다. 그 중에 꼭 내 신랑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그런 모습이다. 엄마, 나 남자친구가 있어. 모르지 않잖아 라고 말해도 그래도, 라고 말한다.
이런 엄마 모습에 체할 것 같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내가 과년한 딸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인가보다.
그러던 중 나의 베넷부인은 오늘 드디어 내 신경을 제대로 건드리셨는데 다름이 아니라 지금 만나는 사람(a.k.a. 걔, 니 미국인 친구, 절대 남친이라고 인정 안 함)이랑은 뭐가 됐건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니 “정조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임하지 말고 여러 사람에게 열린 자세로 있으라고 하시었다.
?
정조…? ㅋㅋ순결이라고 안 한게 어딘가 싶다. King of Joseon…?
조선시대도 아니고 정조가 웬말이람.
귀를 씻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내 엄마라니! 성희롱이라도 당한 기분이지만, 이 사람이 내 엄마라니! 정조는 무슨 얼어 죽을 정조?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거지? 내가 설마 뭐 몸 주고 맘 주고 정 주고 아주 그냥 열녀 돼서 막 못헤어지고 혼자 애달프고 그렇다고 생각하는건가? 엄마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내 인생관을 연애관을 나를 폄훼하고 싶은걸까?
충격을 받았고,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비록 내가 엄마 딸이지만 모녀관계라 해서 모든 말을 다 내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성인인 딸이 스스로 선택한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딸에게 저런 무례한 언사를 할 수가 있을까.
그만큼 이번 일은 엄마와의 관계를 재고할 정도로 모욕적이었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쯤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가도 가도 너무 갔다. 엄마의 나에 대한 배려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엄마에게 나는 이렇게까지 못 미더운 딸이고 존중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실망스럽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의 베넷부인은 마냥 속상한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있는데 내가 왜 걔를 만나는지 모르겠는거다. 내 귀한 딸이! 왜! 저 이상한 미국놈을 만나가지고! 왜! 당장 헤어지라고 하고싶지만! 저 성질머리에 지랄할게 뻔하니까! 헤어지라곤 못하겠고! 헤어지라는 말 대신! 쟤랑 만난다 해서 다른 사람에게 벽 치지 말고 만나보라고 말이나 해봐야지. 아이고 속상해. 뭐 이런류의 상태인거다.
애초에 베넷부인의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란 지극히 한정적이다. 제 얼굴에 침뱉기 같아서 어째서 지금의 남자친구가 입구컷인지 나열하기도 수치스럽다만 제일 큰 이유는 뭐 당연히 인종이 다른 외국인이며(2세, 혼혈아 걱정)남자친구가 종사하는 컴퓨터 공학은 뭐랄까 부모님 세대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딱히 신뢰감을 주는 직업이 아닌데다 남자친구 부모님 집안은 지극히 평범하고 또 굳이 나누자면 평범 이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건 저런 영 성에 안 차는 외국놈한테 코 꿰여 시간을 허비하며 천하태평인데 어찌 저리 아둔한지 기절할 노릇이다.
소설 속 베넷부인과 우리 엄마는 다른 세기를 살아가지만 사고방식에는 그리 차이가 없다. 엄마는 여전히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인물이고, 물론 나도 거기에 크게 반하지는 않는다.
순진한척 깨인척 하는 바보도 아니고 이미 결혼 전부터 누릴 수 있는게 달라지는건 연애 때부터 그런데 그걸 누가 몰라… 그 부족분은 당연히 사랑으로 덮는거지.
하지만 당연히 나는 그거 하나만 보고 싶지는 않은 거다.
그리고 내 남친이 대체 뭐가 어때서….!
불행히도 영원히 내 편일 것 같았던 나의 아버지도 소설 속 베넷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베넷 씨는 항상 뒷짐 지고 세상을 관망하듯 본다. 엄마와 나의 전쟁이 마치 제3자의 일인 것 마냥…
무엇보다 아빠는 사실 내가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 알고는 있다.
근데 난 현재 A와의 관계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고, 우리가 쌓은 전쟁같은 시간 덕에 얻은 평화, 약간의 권태로움조차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소위 belle epoque는 쉽게 얻어지는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더 그렇다.
그래서 지금 우리 관계에서 크게 현상변경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는다…
난 남녀 관계가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남자는 전세계 어딜가나 널렸고 나와 맞는 사람 찾는 것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즐거운 과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A와도 언제든 수 틀리면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상태로만 봤을 때는 부모님 문제만 해결되면 그냥 무브인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같이 지내는 것에도 큰 불편함이 없고 내가 미국에 가는 계획도 사실 이제 구체성을 띄어가는 단계이니만큼 당장 헤어질 마음이 없다. 그것도 인종 다른 외국인에 집안이 좋지 않다는 편견 섞인 얼토당토 않는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남자를 만나는 일에 이 나이 먹도록 부모의 간섭이 큰 것은 아직도 영 철딱서니가 없는 내 탓일 수도 있지만 유교정서를 완전히 탈피 못한 나의 장녀 컴플렉스와 나에 대한 기대가 터무니없이 너무 높은 까닭도 있다. 제발 딸램에 대한 현실직시 좀 해주세요…
내 세상은 부모님이 만들어줬는데 그 세상을 깨야 하는 건 나로서도 두렵고 싫은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이 남자가 싫어져서 헤어지는 것이 아닌 단순히 부모님의 편견 때문에 헤어진다면 그게 나는 내 스스로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부모님 기대를 크게 충족시켜드린적도 없건만 크게 마음 상하게 했던 기억도 없어서 이런 날들이 쌓일수록 마음이 매우 버겁고 힘들다.
살다보면 부모님과도 언젠가 한번은 크게 싸우게 된다던데 난 그게 고작 연애 때문이라니 내 인생 참 진부하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우려를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에 나로서도 마냥 아 몰랑! 내가 좋을 대로 할 거고 내 인생이야~ 간섭 노노! 할 수도 없다.
외국인을 만나 나와 연고가 없는 나라에 정착할 계획을 한다는 것은 커리어를 중대하게 뒤흔드는 일이고, 이 남자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인지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그게 두려운거다. 품안의 자식이지만 세상이 넓으니 넓게 키우려 노력하고 일찍 내보냈는데 부모가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겠다 하면 불안한 맘이 더 클 수밖에. 언젠가 넘어져 깨지더라도 내 품 안에서 깨졌으면 좋겠는데 계속 외국에 있으면 그 마저도 보듬어주기 어려울까봐 염려된다고 지나치듯 말한 아버지의 말도 사실 지극히 사랑의 말이라서 이해가 안 되지는 않는다.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은 낯설고 두려운데 거기에 부모님의 지지까지 없으니 더욱 조심스러워지는게 사실이다.
게다가 만약 정말 내가 영영 이민을 가버리면, 엄마 아버지가 나이 들어갈 때 내가 곁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 아무리 비행기로 자주 오갈 수 있다지만서도 그건 말이 쉽지 생각보다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면 한번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아진다는 것을 잘 아느니만큼 많이 많이 싫다.
살다보면 이십년 남짓 키워준 부모보다 여생을 함께 할 상대가 중요해진다고들 하나, 나는 그래도 부모랑 명절 때 찾아뵙듯 일이년에 한번 보고 살고 싶진 않고 되는대로 자주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자식 노릇도 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한국에서 평생 살 생각이 딱히 크진 않아 해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꿈꾸던 자식노릇에 모순이 생기니 그것부터 걱정이 된다.
어쩌면 이런 여러가지 악조건 때문에 더욱 더 나는 미국으로 가야하는 정당성이 강하게 필요한 것 같다. 내가 꼭 이 남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미국을 고려하게 된 게 아니며 분명 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임을 강화해줄 만한 당위성, 이 결정은 대단히 나를 위한, 주변의 개입이 없는 나만의 결정이라는 증거.
만일 내가 이 로직에서 스스로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떠난다면 나는 그렇고 그런, 흔한 국제 연애 국제 결혼 실패담의, 너무 사랑해서 떠났으나 어느 순간 사랑이 현실이 됐을 때, 그러니까 무언가에 지쳐서 내가 진정 행복하지 못할 때에는 정작 남자 탓을 하는 못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을 책임감 있게 살려면 부모나 남자나 뭐나 다 떠나서 사고하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맞으니까. 그들이 대신 살아주는 인생이 아니니까. 결혼무새 남자친구나 척화비 세운 부모님이나 다 제쳐두고 진정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모두 방해의 소리일 뿐.
그러다보니 결국 고민의 시간은 길어지고, 고민하는 내내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순탄히 살고 싶은 마음 중 매일같이 갈등하며 저울질 하며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난 이렇게 진부하고, 어리석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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