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만난지 어느덧 일년이 넘어가고 있다. 헤어지고 일년간 각자 인생을 살다가 재회를 한 것이니 총 만난 기간을 합산하면 이년 반이 넘었다. 통상 이 정도 만나면 미래 얘기를 한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그 다음을 얘기하면 무조건 싸우기 때문에 다음은 계획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재회 전 , 종종 우리가 파트 원 이라고 부르는 연애기간 동안 숱한 싸움의 주제나 헤어짐의 이유가 그 다음에 대한 계획이었기 때문이고 똑같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연애는 필연적으로 롱디가 수반되고 나는 … 성격이 좀 이상한건지 뭔지 남들이 힘들다고하는 롱디가 잘맞았다. 그것도 외국인이랑 하는 연애라 더 편했다. 남자친구와 일상의 일부를 공유하며 은은하게 만날 수 있는 연애가 싫은 것은 당연 아니지만 롱디만의 매력이라는게 분명 있었다. 롱디이기 때문에 느끼는 혼자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나 항상 여행 같은 데이트가 너무 좋았다고 해야하나… 늘 서로를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 이벤트가 되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롱디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롱디청산이 모든 커플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당장 롱디에 불만이 없지만 사실 여기 계속 있을 생각도 없기 때문에 여길 떠나게 된다면, 을 가정하고서 남친 나라를 한번 리스트에 올려보는 것 정도이다.
일반화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이 미래 계획을 먼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인가 A는 줄곧 질문을 던지지만 나는 정말이지 방어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싸움으로 매번 이어졌다.
특히 거리를 좁히는 문제는 어느 한 쪽이 그냥 지금 하는게 뭐건간에 때려치우고 짐 싸들고 건너오는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그건 매번 결국 나였다.
이유도 간단했다.
미국이 더 살기가 좋고 거주의 형태나 직업의 기회가 다양하며 나 정도 되면 (물론 시민권 혹은 영주권자의 파트너가 된다는 가정하에) 잡을 구하기가 한국보다 어렵지 않다는 이유와 함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대한 미국의 대우를 생각해봤을 때 A가 미국서 받을 수 있는 보수가 명백하게 다른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보수보다 많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국을 떠난 이후로는 내가 사는 동네가 미국에 비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 기본값이 되어버려 도대체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 정도.
그럼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는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은 : 미국행이 지금 내가 가진 자유로운 고독감과 직장을 버리고 부모님의 반대/기대를 꺾으며 내 진로에 대한 (잠재적인) 다양한 경우의 수를 큰 폭으로 축소한채 선택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이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A를 얼마나 사랑하든, 또 내가 뭘 하고자하든 모두 내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도대체 니가 뭔데 울 엄마아빠도 천천히 고민해보라는 진로 문제를 들먹이면서 나를 압박하냐?” 는 식으로 나왔다.
그러면 A는 “너 매일 불평하는 일상적 스트레스랑 불편함을 보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혹시 그냥 떠나려는 노력을 들이기 싫어서 그러는거 아니냐? 나랑 같이 살고싶긴 한거냐? 내가 이 관계에 들이는 노력만큼 너 쪽에서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하고,
그럼 또 나는 “뭐? 내가 이 관계에 너만큼 노력을 안한다고? 거길 안가면 내가 노력 안하는게 되니? 넌 왜 못오는데?” 하면서 발작하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하며 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파탄나기 시작한다.
결국 총 세번의 반복된 싸움 끝에 A는 나에게 다시는 미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인생 살고 본인은 본인 인생 살되 내 생각이 정리가 되는대로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놈의 “언제까지 기다려야” 라는 말이 PTSD 올 정도로 싫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심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을 저 말은무슨 가스라이팅도 아니고 불쑥불쑥 자주 튀어나왔는데, 난 내가 기다리라 한 적도 없고 기다림이 궁극적으로 뭘 위한건지 본인도 잘 설명 못하면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다린다는 인식을 심어서 내가 우유부단하고 결정력이나 실행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은 내가 현실적이고 안멍청하고 내 인생 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일반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제발 알아주면 좋겠어서 A가 다시는 관련된 주제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드디어 날 이해하나보다 하고 안도했다.
그리고나서 A와의 미래를 잠깐 상상해보는 것이다. 글쎄 그냥 우리가 산책을 나선다거나 퇴근 후 쇼파에 앉아서 쇼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적 모습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게 같이 살(살아야 하는) 이유로 충분한건지 모르겠다.
나랑 이 친구는 지금 잘맞아서 함께인걸까 아니면 그냥 어쩌다보니 인생의 시기가 겹친걸까.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가. 남들은 다 어떻게들 살고 연애하고 결혼하나?
스페인 태국 미국 독일 터키 한국 이렇게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싸운 적 없어서 우리 참 잘 맞는게 아닐까 했는데 결국 미래에 대한 문제 때문에 헤어졌었고 지금 그걸 또 반복하고 있다…
당연히 … 우리가 함께 해야할 이유 같은건 없다.
그냥 지금 서로 마음이 맞아서 연애 중인 것일 뿐 여기 메여야 할 이유도 하등에 없다. 근데 우리가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생각보다 많다. 그 중간에서 타협하려고 하니까 그게 비극이다. 그럼 더 이상 피차 시간 낭비 않게 연애에서 끝내야 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나도 참 당장 끝낼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해서 얘랑 계속 만날 것도 잘 모르겠으면서 질질 끌고 생각만 많은 것 같긴해서 내가 답답하다.
뭐니뭐니해도 다 핑계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엄마아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A와 뭘 하건 이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만나야 하나 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든게 사실이다. 나는 장녀고, 또 엄마아빠가 날 많이 사랑하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반대를 하는 연애를 해도 되는걸까?
반대로는 또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상처받아야 하나?
엄마는 특히나 내가 누굴 데려오건 간에 성에 안찬다는 식으로 보곤 하는데 엄마의 머릿속 내가 만나야 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정해져있고…A와 내가 안헤어지니까 내가 영미권에 살고싶다고 착각한건지 얼마 전에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들이밀어서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암튼 엄마 입장에서는 영 탐탁치 않은 컴퓨터 만지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것도 외국놈이. 싶은거다. 엄마 입장에서 A는 집안도 없고 지금이야 괜찮지 근데 그게 뭐 계속 가냐 그 직업은 계속 머리 써야 하기 때문에 40대만 되도 나가떨어지는 직종이라고 말린다.
그러면 나는 내가 뭐 결혼한대? 그냥 연애하는데 자꾸 진지하게 굴지마 확 결혼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서류 제출해버림 그만이야 라고 반협박조로 말한다.
나는 늘 엄마아빠가 지지하지 않는 결정은 안할거라고 말해온바 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그게 합당한 이유가 있을때인데 애가 백그라운드 없고 컴퓨터쟁이(요즘 각광받는 직업 아니었냐고…)에 인종 좀 다르다고 반대하는건 도대체가 무슨 개같은 이유인지 모르겠어서 막말로 개기는 중이다. 내가 뭐 대애단한 세기의 연애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럴 의지도 없지만 날 사람을 보라고 가르쳐놓고서는 연애대상으로 데려온 남자들은 사람을 안보고 그 외의 것을 보니 반항심이 생긴다.
이러니 한국을 가기가 싫다. 특히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아마 머리가 한뭉탱이씩 빠질지도 모른다. 한국 가면 자유 자동 반납인건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수천키로미터 밖에서도 내가 이제 나이가 너무 많다느니 걱정이라느니 하면서 여기저기 나를 광고해서 팔아치울 궁리를 하는건지 온갖 짜증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데 한국 들어가면 안봐도 뻔하다. 앓느니 죽지. A랑 결혼해버리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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