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선택의 집합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의 결과물인걸까.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하나하나 선택한 결과다.
불교신자도 뭣도 아니건만 내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의 까르마(karma)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오늘도 내 까르마를 양어깨에 이고 간다.
퇴사 직전, 고민과 걱정 우울과 불안을 가득 안고 잔뜩 놀라고 겁먹은채로 집에 찾아온 나에게 장자크 루소가 될거냐며 웃던 Y아저씨가 생각난다. 아저씨는 나에게 너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좋은 선택을 하므로 결국 좋은 결과를 불러온다고 했다. Y 아저씨는 신실한 무슬림 신자지만 참 이런 삶의 태도는 불교적이지 않은가?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종교는 서로 맞닿아있다. 그래서 나는 무종교를 택했다. 모든 종교를 취사선택하기 위해서. 신을 믿기 보다는 종교가 인간사에 주는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늘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후회되는 일 투성이이다. 2년전 그때, 이 직장이 아닌 다른걸 선택했다면 내 인생은 또 어떻게 펼쳐졌을까? 5년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8년 전 그때… 자꾸 이렇게 2-3년 단위로 인생에 있어 굵직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그 당시의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걸 선택했고, 그 선택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내 인생은 처음인만큼 분명 과거의 더 어린 내가 잘한 일도 있지만 그만큼 아, 지금의 나라면 절대 안 그랬을텐데 하고 후회하는 일도 많다. 인간관계에서도 아 그때 사람 그렇게 쉽게 내 인생에서 내보내지 말걸 하고 후회되는 인연도 있고 말이다. 예전에는 일종의 쿨병에 걸려서 가는 사람을 안 막는데에 도가 텄었나보다. 약간의 삐걱거림을 가지고 나는 저이랑 안맞아 하며 안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옳으니까. 나는 변화하지 않을거니까. 나에게는 내가 최선이니까.
시간이 지나고 저게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어린 생각이었는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물론 사회에 나와보니 도저히 갱생불가한 병신도 많다. 아니다,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정상인은 아무말 없거나 보석같이 숨어있다. 그래서 보석을 발견하면 그렇게 기쁜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나보다. 한 해 한 해 세상에 나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명제의 참 뜻을 깨치고 그렇기에 나랑 잘 맞는 사람은 귀하니 한명이라도 찾아내면 그 사람이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함을 알게 된다.
내가 앞으로 내릴 결정들에 있어 더 지혜로울 수 있으면 좋겠다. 단순한 단기적 계획이나 충동적 감정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반의 반세기를 살아내고 나니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혜가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