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

P 이모와 숲속 집

viv! 2023. 4. 3. 06:09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준비 없이도 불쑥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P이모의 집이 나에게는 그렇다. 이제 햇수로는 20년째 알고 지내는 이 아줌마는, 나에게 코미디언이자 테라피스트이자 엄마이자 교수이자  사회운동가이자, 사실은 K의 엄마이기까지한 여자로 내가 아무때고 찾아가도 그냥 기꺼이 집 한칸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다. 정말이지 미리 전화기를 켜서 이모, 나 갈게요.할 것도 없고, 이모 저 집 앞인데요. 할 것도 없다. 그냥 도착해서 제집처럼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이모랑 나의 관계는 특별하다. 난 분명 K의 친구인데 K와 교감하는것만큼이나 P이모와 교감을 하고, K에게는 “아 맞다 나 내일 너네 엄마집 갈건데 저녁에 오실?” 처럼 웃긴 말을 한다.

그래서인가 이모의 조교인 E는 나에게 농담처럼 너는 K친구냐 P교수님 친구냐 하고 놀리곤했다.

P이모는 남과 필요이상으로 터놓고 지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또 어려워하는 내가 정말 유일하게 모든걸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지구상의 몇 안되는 공간을 제공해준다.

이모 집을 찾으면 나는 아기마냥 계속 잠을 자는데 이모집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즈넉하고 조용하고, 공기가 맑고 또 쓸데없는 타인의 소음과 짜증나는 아잔소리(모스크에서 들리는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모는 내가 졸립다고 하면 “도시에서 독을 품고 와서, 말그대로 디톡스를 하는 것” 이라고 한다. 난 그 표현이 참 맘에 들었다. 도시 독을 한참 잠으로 게워내고 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모 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모는 소위 맥시멀리스트이다.

온갖 잡동사니부터 가구, 동식물과 사람까지 이모의 손을 거치면 모두 의미있는 것이 되어서 이모 집에는 필요 없는 것이 없다.

이모네는 출신성분이 각기 다른 5마리의 개와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우즈베키스탄 여인과 다큰 딸래미인 K까지 3명을 기본으로 항상 +@ 누군가를 손님방에 재우면서 지낸다. 이모 집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서 잠시 들른 이도 며칠간 머무르게 하는 이상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도 이 집이 편한건지 이모의 다섯마리 개들 중 어느 하나도 이모가 직접 데려온 개는 없다. 떠돌이 개가 이모 집에 머무르다가 붙박이처럼 집 개가 되었고 옆집이 잠깐 맡긴 개가 떠나기 싫어하면서 또 이모 집 개가 되었다. 심지어는 K의 전남자친구가 개를 맡겨두고는 마땅히 개를 데려갈 날을 정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이모집 개가 되었다.

책이 빼곡한 개털날리는 이모집 거실 다섯마리의 개.



이모는 사랑하는 게 많다. 꽃, 낙엽, 구름부터 지렁이, 애벌레, 달팽이, 노린재 같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물이 이모의 카메라에 담긴다.

이모의 자연인스타

덕분에 이모의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무심코 내리다가 적나라한 벌레의 사진에 깜짝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벌레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것 만으로도 나와 다른 그릇 크기를 지닌 사람이다. 하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의 크기는 어떻겠는가. 현정부에 미운털이 콕 박혀서 옥살이 중인 뮤젤라와 마찬가지로 나는 P이모도 혹여나 잘못될까봐 전전긍긍했었다. 이모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도청 위협이나 협박이 줄곧 이어졌을 때에도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한국으로 망명을 시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절대 안 오겠지만…

이런 좋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이라 자연히 이모의 집은 동네 사랑방으로 변한다. 날이 화사한 날에는 정원에서, 날이 흐린 날에는 테라스에서, 추운 날에는 거실에 불을 쬐며 앉아서 이모와 손님들은 차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며 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이야기 꼭지를 들고 찾아오기 때문에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도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집 사랑방의 매력이다.

사실 더러 이모의 푸근한 인심과 남을 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빈대 같은 이도 꼬이기 마련인데 이모는 그냥, 아무렴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식이다. 어쩌면 나도 그 빈대중 하나

그래서 한 때는 P이모의 오지랖이나 과도한 인정이 싫었더랬다. 왜 저렇게 마냥 받아주나..! 인간들은 저런 이모를 이용하는데! 근데 이 사람의 천성이 그런것을 어쩌겠는가. 이모는 그냥 남에게 모진 소리도 못할 뿐더러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해는 기꺼이 감수하는 마더테레사 같은 사람이다.

이모는 교수이면서 이모의 필드에서 영향력이 넓은 사람이다. 언론에 자주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최근에는 지진건으로 한국 방송에도 몇 번 나왔다. 나에게는 편하디 편한 푸근한 여자로서 친엄마 못지 않은 막말코멘트를 날리는 여자가 tv에서 교양있게 인터뷰를 하는 걸 보면 상당히 낯설다.

이 집과 이모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는 나이를 먹어가며 차차 깨달아가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크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뭐가 그렇게 놀라고 무서워서 이모집을 찾았었는지 모르겠다. 몸이 아파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가 방황하는 동안 홍차에 레몬조각을 넣어주면서 이모는 나와 저녁시간마다 오래오래 대화를 나눠주었다.무엇이건 그때는 그런 말을  듣고싶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모는 아무튼 놀란 나를 다독여주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정신적 긴장이 풀리면서 온갖 여독이 몰아치고 몸이 아파버렸는지도.

20대 후반이 되어서 나는 또 혼란스러워하며 이모 집을 찾았다. 이모와 또 차를 마시면서 몇 시간이고 얘기했다. 몇년 째 이모랑 맞이하는 그 저녁시간의 차 테이블이 너무 그리웠던 거 같다. 내 속에 있는 응어리들이랄까, 고민들과 걱정들을 이모 앞에서 부끄럼도 없이 술술 말하게 된다. 이번에도 내 머리가 복잡한거 같으니 이모는 더이상 묻지 않고 그냥 가만히 들어주었다. 내 일상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도, 내 인생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도.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매번 그냥 인생의 한 챕터 한 챕터를 힘겹게 넘어갈 때마다 이모를 찾아오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슬픔의 고지에서 기쁨의 순간에서 또 방황하는 시간에 이모의 집에 들렀던거 같으니까. 언제 또 다시 무슨 이야기를 들고 이모 집을 찾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모와 또 찻잔 앞에 마주할 날을 기약하면서 지금은 또 당분간은, 잠시간은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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